
진실보다 믿고 싶은 거짓이 더 편할 때 - <메멘토>(2000, Memento) 영화 리뷰
줄거리
전직 보험 조사관 레너드 셸비는 아내가 괴한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 밤의 충격으로, 새로운 기억을 단 10분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그래서 레너드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 중요한 정보는 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메모를 남긴다. “저 사람을 믿지 마.”, “차 번호를 기억해.” 같은 기록들은 그의 기억을 대신하는 도구가 된다.
레너드가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 것. 그는 범인의 이름이 존 G라는 단서를 붙잡고 끊임없이 추적을 이어간다. 하지만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 삶 속에서 진실은 쉽게 흐려진다. 그의 주변에는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테디라는 남자가 있고, 자신만의 목적을 가진 나탈리라는 여자가 등장한다. 문제는 레너드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실은 너무 쉽게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부분 영화는 과거에서 미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지만 메멘토는 반대로 움직인다. 영화는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원인을 뒤늦게 보여준다. 장면은 거꾸로 이어지고, 관객 역시 레너드처럼 혼란 속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정말 사실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레너드는 자신이 남긴 메모와 문신을 절대적인 진실처럼 믿는다.
결말
테디의 조언을 따라 어느 폐건물로 향한 레너드는 마약 밀매업자 지미를 복수 대상인 '존 G'로 오인해 살해한다. 그 후 만난 테디가 다가와 충격적인 진실을 폭로한다. 사실 진짜 범인 '존 G'는 이미 오래전에 잡혀 레너드가 복수를 끝마쳤다는 것이다. 처음 레너드를 도왔던 테디는 그가 복수한 사실 마저 잊고 수사 기록을 조작하면서까지 범인을 찾아 헤매자 그를 이용해 마약상들을 죽여서 실적을 챙기고 돈을 챙기려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 후에 들려준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사실 아내가 그 사건 뒤에도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사건의 충격으로 기억의 장애가 온 레너드를 보며 매우 힘들어 했었고, 레너드가 늘 기억상실증의 예시로 들던 보험 고객 '새미 젠키스'의 비극적인 일화가 있는데 기억 상실에 걸려 아내에게 인슐린을 과다 투여해 죽게 만든 일화가 사실 새미의 이야기가 아니라 레너드 '자신의 실제 과거'였다. 아내는 레너드의 기억 상실증을 테스트하려다 인슐린 과다 투여로 사망했던 것이다. 레너드는 아내를 제 손으로 죽였다는 끔찍한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새미'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기억을 왜곡했고, 스스로 복수라는 연극을 계속하기 위해 '새미 젠키스의 이야기를 기억하라'는 문신을 새겨 자신을 속여왔다.
진실을 직면한 레너드는 괴로워하지만, 곧 10분의 기억이 사라질 것을 직감한다. 그는 자신을 도구로 이용한 테디를 다음 복수 극의 타깃으로 만들기 위해, 테디의 사진 뒤에 "그의 거짓말을 믿지 마라"고 고의로 메모를 적고 그의 차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도록 기록을 조작한다. 10분 뒤 모든 것을 잊은 채 타투숍으로 향하는 레너드의 모습을 비추며, 그는 다시 자신이 만든 가짜 시나리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해석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메멘토>는 '기록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체적인 왜곡'을 집요할 정도로 파고드는 철학적인 영화다. 특히 흑백 영상은 시간 순서대로 앞으로 흘러가고, 컬러 영상은 거꾸로 흐르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관객 역시 레너드처럼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혼란을 직접 경험하게 만든다. 관객은 정보를 완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끊임없이 판단하고 의심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자신 역시 레너드와 똑같이 편집된 정보만 바라보며 진실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 속 레너드는 기억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다. 몸에 문신을 새기고, 사진을 찍고, 메모를 적는다. 그는 그것들을 절대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믿는다. "기억은 왜곡되지만 기록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 속 레너드가 끝없이 붙잡으려 했던 믿음이다. 하지만 영화는 굉장히 차갑게 반문한다. 정말 기록은 객관적일까.
결국 기록을 선택하고 남기는 존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기억이 왜곡되듯 기록 역시 기록하는 사람의 의도와 감정에 의해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다. 레너드는 기록을 맹신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기록 자체가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레너드는 사고를 당한 후의 10분짜리 기억은 믿지 않았지만, 사고를 당하기 전 과거의 기억을 믿었다. 그는 아내에 관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기억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왜곡된 것들 투성이었다. 자기 손으로 아내를 죽였다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새미 잰키스' 라는 인물을 창조해내버렸다.
레너드는 이미 오래전 자신의 복수를 끝냈다. 하지만 복수가 끝난 순간 그는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새로운 거짓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끝나지 않는 복수라는 가짜 시나리오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로를 만들고, 그 미로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진실보다 삶의 동기가 필요했을뿐이다.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레너드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존재다. 그는 기억이라는 시스템에 갇혀 살아가는 피해자인 동시에, 그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주이기도 하다. 복수라는 목적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이유 역시 사라진다고 믿었기에, 그는 죄 없는 사람들을 범인으로 만들어가며 삶을 유지한다.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거짓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메멘토>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확신하고 있는 삶의 기준과 상식,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은 정말 진실인가. 혹시 우리는 마주하기 두려운 현실을 외면한 채, 스스로 만든 안락하고 잔인한 시나리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너드의 비극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